본문 바로가기

평론-"정해경의 화(畵)로서의 서(書)"- 김동일(대구 카톨릭대 교수) 2023 > 소개 정해경 현대미술


소개 HOME


평론-"정해경의 화(畵)로서의 서(書)"- 김동일(대구 카톨릭대 교수) 2023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회 작성일 25-08-18 11:57

본문

"정해경의 화(畵)로서의 서(書)"

                                               

                                                                       김동일(대구 카톨릭대 교수)



정해경의 작업은 한지에서 시작해서 한지로 귀결한다.  정해경의 작업의 출발점으로서의 한지와 그 귀결로서의 한지는, 그러나, 다소 다른 것이다.  정해경은 자신의 미학적 경력을 서예가로 시작한다.   2008년 개인전에서 이미,  자신의 출발로서 서예적 문제의식에 깊이 천착해 있다.  "모필로 연출되는 먹빛에 매료되어 시작한 서예는 자연스레 예술의 본질인 선에 천착하였고, 전예해행초를 익히며 간단하지 않은 필획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선을 경험하였으며 또한 서예를 통하여 새로운 공간개념과 필세를 통한 시간성의 의미를 자각하게 되고 내 안에 축적되었다.  서예가 오랜 기간 선을 알아가는 수련 기간이 되었다면 문인화를 전공하면서 그 선을 다양한 표정을 나타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작가메모)


서예는 시간과 공간의 예술이다.  서예의 특성은 붓끝에서 나온다.  모필은 먹빛으로 흔적을 남긴다.  먹빛으로 현현하는 모필의 운동이 바로 선이다.  선은 시간의 흔적이다. 서(書)는 그래서 선묘의 예술이다.  정해경의 선은 빠르게 뛰고, 날며, 운동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의 선이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기에 너무나 자유롭다는 점이다.


서(書)의 가능성은 모필의 자유와 문자의 형태에서 비롯되는 중력, 혹은 제약 사이에서 펼쳐진다.  이미 정해경의 필혹은 좀 더 표현적인 자유로운 운동을 내포한다.  그것은 표현의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정해경은 필획과 선묘가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의 빠름과 느림, 그리고 공간의 얕음과 깊이 사이에서 열려진 다양한 가능성 속에서 좀 더 유희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다.  작가의 유희적 충동은 작가를 서(書)로 부터 화(畵)의 형식으로 이행하게 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문인화는 문자와 형상으로 이루어진다.  붓끝의 운동은 문자의 절제와 형상의 자유를 구가한다.


<매화1>(2008)에서 선묘는 수직으로 낙하는 가지들을 다양한 필감으로 내려진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잎이 화폭을 가득 채운다. <죽1>, <난1> 역시 수직의 화면은 표현적 자유를 담기에 적합한 구조로 보인다.  반면 문자는 최소한의 가독성을 위해 차분한 형태적 절제를 유지한다.  정해경의 서(書)에  표현과 절제의 균형은 문인화의 형식을 취했으나 이 균형은 잠정적일 뿐이다.  이미 정해경의 필획은 서(書)와 화(畵)의 문인화적 균형을 벗어나 있다. 이 이탈, 혹은 탈주는 이른바 '현대적' 문인화의 느슨한 경계조차 벗어난다.  이미 선묘는 문자 구축의 시간적 선후의 제약을 넘는다.  공간 또한 묵의 농담과 그 농담의 겹침을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되기에는 너무나 자유롭다.  진한 것이 오히려 멀리 침잠하고 묽은 것이 오히려 전면에 떠오른다. 이미 정해경의 화는 서(書) 준거를 벗어난 듯 보인다.
c86ec7b39ebd2b2f77d0bee2b6ae6504_1755657596_3079.jpgc86ec7b39ebd2b2f77d0bee2b6ae6504_1755658476_5143.jpgc86ec7b39ebd2b2f77d0bee2b6ae6504_1755658585_7875.jpg 


서(書)로 부터 화(畵)의 탈주는 다소간 극적이다.   2011년 개인전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꽉 잡고 절대 놓고 있지 않는 게 뭘까.   이번 작업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였다.  움켜지고 있던 양 손을 놓았다. 손이자유로워지고, 눈, 귀, 코, 머리, , , 넘치도록 펼치고 지우고, 숨을 고르고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 ,"(작가메모) '꽉 잡고 절대 놓고 있지 않는 것'이란 바로 서(書)다.  작가는 서(書)를 놓아 버린다.  서(書)를 놓아 버리고 얻은 것은 자유였고, 그 자유는 화(畵)로의 이행으로 나타났다.   화(畵)를 통해  그는 손과 눈과 귀와 코, 머리의 자유를 얻는다.  표현은 문자의 형태적 제약을 벗고, 시야는 더 넓어지며, 감각은 낯설어지고, 사고는 펼쳐진다.  여기서 서(書)의 준거로부터 새로운 화(畵)의 실험으로, 정해경은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화(畵)의 자유의 양태는 흥미롭다.  정해경은 자신이 움켜지고 있던 서(書)를 찢고, 겹쳐, 다시 잇는다. 이 찢음과 겹침, 이음은 문인화에서 보여주었던 필획의 달림과 멎음, 솟음과 내림의 변화를 대신한다.  새로운 실험은 서(書)의 부정이며, 자신의 미학적 과거에 대한 부정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그 부정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서(書)의 가능성으로서의 화(畵)에로의 진입이기도 하다.  찢어진 서(書)의 흔적들은 또 다시 켜켜이 쌓여가며 화(畵)

로서의 서(書)로 나타난다.


해체된 문자, 문자의 해체가 만들어 낸 새로운 문자, 문자는 문자이되, 해석으로 고정되지 않는 문자, 시간의 과거에 고착된 서(書)의 흔적이 파편이 되어  새로운 서(書)다.  읽을 수 없는, 읽혀지지 않는 서(書)는 화(畵)

가 된다.  그의 화(畵)는 문자적 추상이라기 보다는 회화적 추상에 도달한다.  정해경이 구사하는 회화적 추상의 방법론을 단순히 한지꼴라쥬로 단순화하기 어렵다.  그의 꼴라쥬는 서(書)와 자신의 미학적 과거를 찢고, 겹쳐,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서의 질서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유인 동시에 해체와 재구성의 의지이자 시도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해체와 재구성의 궤적 어딘가에서 그의  중심이 붓과 붓이 그려내는 필획으로부터 한지 차제가 지닌 물성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요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  서(書)에서 한지는 먹이 스며드는, 배면이다.  여기서 한지는 필획의 변화를 발현하는 장(場)이다.  이 장 없이 서(書)는 완성되지 않는다.  동시에 서(書)에서 한지는 문자의 의미를 지탱하는 절대의 공간이다.  문자는 의미를 가져야 하고, 그 의미들은 견고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서(書)에서 한지는 침해되어서는 안될 의미의 틀거리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지는 서(書)의 필획 없이 그 자체를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선묘의 흔적 없이 한지는 하나의 물성에 불과할 뿐이다.  정해경의 서(書)로부터의 탈주는 서(書)의 장, 곧 의미의 절대공간을 찢고, 짓이기고, 겹쳐 이어 화(畵)에 진입할 용기를 준다.


화(畵)의 자유를 통해 새로운 서(書)를 구축하는 주체는 붓과 필획이 아니라 한지 자체의 물성이다,.  그 물성이 찢김과 겹침의 논리와 질서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한지의 물성이 붓과 필획을 대신하는 것이다.  한지의 찢음과 겹침의 물적 논리가 선묘의 시공간적 질서을 대신하는 새로운 서(書) 를 창출하는 것이다.  2016년 이후 정해경은 실험의 궤적을 이어나간다.  그는 한지의 물성이 갖는 찢김과 겹침의 논리에 이해하고, 그 논리의 가능성을 조율하는 준거를 회복한다.  그는 한지의 물적 논리를 유지하되 일정한 크기와 질서로 찢고 겹쳐 만들어내는 형상은 독특한 경험을 준다.  우연한 것들의 질서와 논리적인 축적을 통해 그는 화(畵)의 형상적 균형을 보여준다.  (<균형 Balance>, 2016). 


정해경의 화(畵)로서의 서(書), 해체된 서(書)는 다층적인 의미의 층을 갖는다.  과거의 서(書)의 잔해들이 해체되어 재구성된 서(書)를 이루고 여기에 날카로운 칼자욱이나 필획들이 가해져 새로운 서(書)에 귀결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전통 문인화적 서(書)의 복원을 통해 일상의 의미를 복원한다(<무제>, 2018).  서(書)의 부정과 부정된 서(書)를 통해 화(畵)로서의 새로운 서(書)에도달하는 것이다.  그 서(書)는 서로서의 서(書)가 아니라 화(畵)로서의 서(書), 회화적 서(書)라 할 수 있다.


2023년 영담한지미술관 레지던시(경북문화재단 지원) 결과물 전시에서 제출된 작업 역시 흥미롭다.  화면의 주체는 한지 그 자체였다.  한지가 가진 물성은 그 자체로 단순한 여백이 아니라 무한한 공간으로 자리를 잡는다.  수직의 화면 구조 하단에서 먹을 머금은 한지는 차별적인 농담을 만들며 불규칙한 색면층을 만든다.  화면의 상층은 물기를 한 껏 빨아들였다가 말라버린듯 보인다.  이러한 수분의 접촉에 따른 한지의 물성에 관한 이러한 실험을 이제 원숙한 단계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거기서 제기된다.  그의 실험은 서(書)의 해체와 재구성에서 보여준 파괴적 충격보다는 한지의 물성 자체에 환원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환원 넘어 과연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을까?   이러한 의문은 향후 정해경의 작업을 가능하는 준거점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61b0d4c6090402311c293430d028418e_1756008980_5972.jpg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